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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리 이븐 아비 탈리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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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알리 이븐 아비 탈리브는 이슬람교의 중요한 인물로, 무함마드의 사촌이자 사위이며, 시아파에서 이맘으로 추앙받고 수니파에서도 존경받는다. 그는 600년경 메카에서 태어나 이슬람 초창기에 무함마드를 따랐으며, 무함마드의 딸 파티마와 결혼하여 하산과 후세인을 낳았다. 알리는 용감하고 정의로운 인물로 묘사되며, 이슬람 율법과 신학 발전에 기여했다. 그는 4대 칼리파로 선출되었으나 무아위야와의 내전 끝에 암살당했다. 알리는 시아파와 수니파 모두에게 영적인 지도자로 존경받으며, 그의 가르침과 업적은 이슬람 문화에 큰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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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리 이븐 아비 탈리브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스탄불의 아야 소피아에 전시된 알리의 이름이 새겨진 서예 인장
이스탄불의 아야 소피아에 전시된 알리의 이름이 새겨진 서예 인장
존칭아미르 알무미닌
아부 투랍
통치
작위라시둔 칼리파국의 4대 칼리파
재위 기간656년 6월 17일 – 661년 1월 28일
이전우트만 이븐 아판
이후하산 이븐 알리(칼리파)https://www.cambridge.org/highereducation/books/a-history-of-islamic-societies/22183D81CFE5E37E5DBED1A0F5AB0FB9/the-abbasids-caliphs-and-emperors/4CD1946A08F2AA9609888ECD9D7D115D
종교적 지위
직책시아파의 초대 이맘
임기632년 6월 8일 – 661년 1월 28일
이전직책 생성
이후하산 이븐 알리
개인 정보
출생기원후 600년경
출생지메카, 헤자즈, 아라비아
사망기원후 661년 1월 28일경 (라마단 40년 21일) (60세경)
사망지쿠파, 라시둔 칼리파조
매장지나자프 이맘 알리 모스크
배우자파티마 빈트 무함마드
우마마 빈트 아비 알-아스
파티마 빈트 후잠
아스마 빈트 우마이스
카울라 알-하나피야
레일라 빈트 마수드|알-샤흐바 빈트 라비아
움 사이드 빈트 우르와
무하이야 빈트 임루 알-카이스
자녀title: 알리의 후손
list:
하산
후사인
자이납
움 쿨숨
무흐신
무함마드
압바스
루카이야
압둘라
자파르
무함마드 알-아우사트
우트만
우마르
아부 바크르
무함마드 알-아스가르
가문쿠라이시 (바누 하심)
부족부족
아버지아부 탈리브 이븐 압드 알-무탈리브
어머니파티마 빈트 아사드
종교이슬람교
암살
사인암살

2. 생애

2. 1. 탄생과 가계

알리는 600년메카에서 아부 탈리브 이븐 압드 알-무탈리브와 그의 아내 파티마 빈트 아사드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의 출생일은 라자브 13일일 것으로 추정되며, 이는 시아파 무슬림들이 매년 기념하는 날이다. 알리는 이슬람의 가장 신성한 장소인 메카에 위치한 카바 내부에서 태어난 유일한 인물일 수도 있다. 알리의 아버지는 메카 부족 쿠라이쉬 내의 씨족인 바누 하심의 주요 구성원이었다. 아부 탈리브는 또한 부모가 사망한 후 그의 조카 무함마드를 키웠다. 나중에 아부 탈리브가 가난해지자 알리는 약 5살 때 무함마드와 그의 아내 카디자에 의해 양육되었다.

터키어 서사시 ''Siyer-i nebi''의 삽화에 등장하는 알리


알리는 무함마드와 마찬가지로 메카의 쿠라이시족의 하심 가문에 속한다. 할아버지는 무함마드와 같은 압드 알무탈리브이며, 아버지인 아부 탈리브는 무함마드의 아버지 압둘라의 친동생이다. 즉, 알리는 무함마드의 부계 사촌이다. 또한 어머니 역시 무함마드의 할아버지의 조카였다.

알리는 서기600년 또는 602년경에 메카에서 태어났다. 장소는 아버지 아부 탈리브의 집이었다는 설과, 카바 신전 안이었다는 설이 있다. 날짜는 라자브월(이슬람력 7월) 13일로 전해진다. 전승에 따르면 어머니 파티마 빈트 아사드는 처음 그의 이름을 "하이데라"(사자)라고 지으려 했지만, 아버지 아부 탈리브가 이를 물리치고 "알리"(고귀한 사람)라는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또한 다른 전승에 따르면 파티마는 "하이데라", 아부 탈리브는 "자이드"라는 이름을 생각했지만, 탄생을 축하하러 온 무함마드가 "알리"라고 명명했다고 한다.

알리가 5살 때 아부 탈리브 가문이 궁핍에 빠졌기 때문에, 그는 무함마드와 하디자 부부에게 거두어져 양자로 키워지게 되었다. 약 11세의 나이에 무함마드의 가르침을 받아들이고 이슬람을 처음으로 고백한 사람들 중 한 명이었다. 알리는 카디자 다음이나 카디자와 무함마드의 후계자인 아부 바크르 다음으로 그렇게 했다. 정확한 순서는 시아파와 수니파 학자들 사이에서 논쟁의 대상이지만, 가장 초기의 자료들은 알리를 아부 바크르보다 먼저 언급하고 있다. 메카에서 무함마드의 이슬람 호소는 610년부터 622년까지 지속되었으며, 그 기간 동안 알리는 특히 가난한 사람들을 포함한 작은 무슬림 공동체를 부지런히 지원했다. 그의 첫 번째 계시 후 약 3년 후, 무함마드는 친척들을 만찬에 초대하여 이슬람으로 초대하고 그들의 도움을 요청했다. 약 14세의 알리는 그 자리에서 자신의 지지를 제공한 유일한 친척이었으며, 그 후 무함마드는 손님들에게 알리가 그의 형제이자 그의 후계자라고 말했다. 이는 수니파 역사가 알-타바리()에 따른 것이다. 이 에피소드에 대한 시아파의 해석은 무함마드가 이미 알리를 자신의 후계자로 지명했다는 것이다.

알리의 가계도
압둘무탈리브
압둘라아부 탈리브
무함마드알리자파르아킬
파티마
하산후세인


2. 2. 무함마드의 가르침과 초기 이슬람 공동체

622년 무함마드는 암살 음모를 피해 메디나로 피신했지만, 알리는 그의 대역으로 남아 목숨을 걸었다. 이 사건은 "사람 중에도 하나님의 기쁨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바치는 종류의 사람도 있다"는 꾸란 구절의 계시 이유로 여겨진다. 이 이주는 이슬람력의 시작(AH)을 알린다. 알리는 무함마드에게 맡겨진 물품을 돌려준 후 메카에서 탈출했다. 메디나에서 무함마드는 형제 관계를 맺을 때 알리를 자신의 형제로 선택했다. 623~625년경 무함마드는 딸 파티마를 알리와 결혼시켰다. 무함마드는 이전에 동료들, 특히 아부 바크르와 우마르의 파티마와의 결혼 제안을 거절했었다.

15세기 이란 서사시 ''카바란나마''의 삽화, 무하마드와 알리


632년경, 나즈란에서 온 기독교도 사절단이 메디나에 도착하여 무함마드와 평화 조약을 협상하고, 예수의 본질에 대해 논쟁했다. 이와 관련된 꾸란 3:61절에는 무함마드가 반대자들에게 mubahalaar(상호 저주)를 하도록 지시하는 내용이 담겨 있다. 무함마드는 알리, 파티마, 하산, 후세인과 함께 mubahalaar에 나타났다. 이들을 의식에 포함시킨 것은 공동체 내에서 그들의 종교적 지위를 높였을 가능성이 높다. 시아파 저자들은 '우리 자신'이라는 단어가 알리와 무하마드를 지칭한다면, 알리는 꾸란에서 무함마드와 유사한 종교적 권위를 누린다고 주장한다.

가장 위에 있는 아랍어 텍스트는 "용감한 청년은 알리 외에는 없고 칼은 줄피카르 외에는 없다"라고 적혀 있다.


메디나에서 알리는 무함마드의 비서이자 대리인으로 활동했고, 꾸란을 기록하는 서기 중 한 명이었다. 628년, 알리는 후다이비야 조약의 조건을 기록했다. 630년, 무함마드는 메카에서 중요한 꾸란 발표를 위해 아부 바크르를 알리로 교체했다. 알리는 메카 정복이 무혈로 이루어지도록 도왔고, 카바에 보관된 우상들을 파괴했다. 631년, 알리는 예멘에 이슬람을 전파하여 하단족이 평화롭게 개종하도록 이끌었으며, 무슬림과 바누 자드히마 간의 혈족 분쟁을 평화적으로 해결했다.

가디르 쿰에서의 알리의 임명 (MS 아랍 161, 1307–8년 일 칸국 필사본 삽화, 162r)


632년 고별 순례에서 돌아오는 길에 무함마드는 가디르 쿰에서 순례자들에게 연설하며 쿠란과 그의 ahl al-Baytar (ahl al-Baytar-Latn, 그의 가족)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알리의 손을 잡고 무함마드는 "내가 mawlaar인 자의, 알리가 그의 mawlaar이다."라고 선언했다. 무함마드는 이 말을 반복했고, 우마르는 알리를 축하하며 "이제 당신은 모든 신실한 남성과 여성의 mawlaar가 되었습니다."라고 덧붙였다. 무함마드는 이전에 무슬림들에게 자신의 임박한 죽음에 대해 알렸었다.

가디르 쿰의 진실성은 거의 논쟁의 여지가 없으며, 고전 이슬람 자료에서 "가장 광범위하게 인정되고 입증된" 보고서 중 하나이다. ''mawlaar''는 다의어이며, 그 해석은 종파에 따라 나뉜다. 시아파는 ''mawlaar''를 '지도자', '주인', '후원자'로 해석하는 반면, 수니파는 알리에 대한 사랑이나 지지로 해석한다. 시아파는 가디르 쿰을 알리가 무함마드의 종교적, 정치적 권위를 부여받은 것으로 간주하는 반면, 수니파는 이를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한 진술로 간주하거나, 알리가 무함마드의 유언을 실행해야 함을 나타내는 것으로 간주한다. 칼리파 시절에 알리는 무슬림들에게 가디르 쿰에 대한 증언을 제시해 달라고 요청한 것으로 알려졌으며, 이는 그의 정당성에 대한 도전에 대응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610년경 무함마드는 알라의 계시를 처음 받았다고 한다. 이때 알리는 무함마드의 아내 하디자 다음으로 두 번째 신자로서 이슬람을 받아들였다고 전해진다. 이후 알리는 무함마드와 함께 이슬람 포교에 힘썼지만, 무슬림들은 잦은 메카 시민들의 박해로 인해 622년 메디나로의 망명을 강요받았다.

히즈라 후, 알리는 무함마드의 오른팔로서 교단의 운영과 지하드 (성전)에 참여했다. 특히 전장에서의 활약이 눈부셨으며, 알리는 바드르 전투, 우후드 전투, 한단 전투에서 잇따라 적 측의 유명한 용사들을 쓰러뜨리고, 하이바르 전투에서는 이슬람 군대가 누구도 함락시킬 수 없었던 하이바르 요새를 함락시키는 등, 용장으로서의 명성을 점점 높여갔다.

2. 3. 무함마드의 사위

622년 암살 음모에 대한 정보를 입수한 무함마드는 야스리브(현재 메디나)로 피신했지만, 알리는 그의 대역으로 그곳에 남았다. 알리가 무함마드를 위해 목숨을 걸었다는 사실은 "그러나 사람 중에도 하나님의 기쁨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바치는 종류의 사람도 있다"는 꾸란 구절의 계시의 이유로 여겨진다. 이 이주는 이슬람력의 시작(AH)을 알린다. 알리 역시 무함마드에게 맡겨진 물품을 돌려준 후 메카에서 탈출했다. 이후 메디나에서 무함마드는 무슬림들을 형제 관계로 맺어줄 때 알리를 자신의 형제로 선택했다.

메디나로 이주한 후, 623년경 무함마드는 알리에게 딸 파티마를 알리와 결혼시키라고 신이 명했다고 말했다.[4] 이 결혼은 이슬람교도들에게 무함마드의 친척 중 가장 중요하고 신성한 인물들의 결합으로 여겨진다. 거의 매일 딸을 방문한 무함마드는 알리에게 다가가 "너는 이 세상에서도 내세에서도 나의 형제이다"라고 말했다. 무함마드는 파티마에게 "나는 당신을 내 가족 중 가장 사랑하는 자와 결혼시켰다"고 말했다.[5] 알리의 가족은 무함마드로부터 자주 칭찬을 받았다. 그들은 또한 "정화의 아야"와 같은 경우에 꾸란에서 영광을 받았다. 일부다처제는 허용되었지만, 파티마가 살아있는 동안 알리는 다른 여성과 결혼하지 않았다.[6] 파티마가 사망한 후 알리는 다른 여성과 결혼하여 많은 자녀를 두었다. 무함마드는 이전에 동료들, 특히 아부 바크르와 우마르의 파티마와의 결혼 제안을 거절했었다.

2. 4. 정통 칼리프 시대

무함마드는 알리가 30대 초반이던 632년에 사망했다. 그와 다른 가까운 친척들이 장례를 준비하는 동안, 안사르(메디나 원주민)의 한 무리가 사키파에 모여 무슬림의 미래에 대해 논의하거나 그들의 도시 메디나를 재차 장악하려 했다. 무하지룬(메카 출신 개종자)의 몇 안 되는 대표자 중 아부 바크르와 우마르는 사키파에 참석했다. 알리의 경우는 그의 부재 중에 사키파에서 논의되었지만 실패했고, 결국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격렬한 논쟁 끝에 아부 바크르를 지도자로 임명했는데, 이 과정에서 폭력이 발생했다고 한다. 사키파에서의 씨족 경쟁은 아부 바크르에게 유리하게 작용했으며, 알리가 후보로 참여하는 광범위한 평의회()에서는 결과가 달라질 수도 있었다. 특히, 쿠라이시의 세습 전통은 알리에게 강력하게 유리하게 작용했지만, 그의 젊음은 그의 주장을 약화시켰다.

앰비그램으로 표현된 무함마드(오른쪽)와 알리(왼쪽)의 모습.


대중의 지지가 부재한 상황에서, 알리는 무슬림의 단결을 위해 아부 바크르의 임시 통치를 받아들였다. 알리는 칼리파 자리를 강압적으로 추구하라는 제안을 거절했다. 그는 자신의 장점과 무함마드와의 친족 관계를 근거로 자신이 지도자로서 가장 적합한 후보라고 생각했다. 알리는 스스로를 무함마드의 지명된 후계자로 여겼다. 무함마드의 생전과는 달리, 알리는 아부 바크르와 그의 후계자 우마르, 그리고 우스만의 칼리파 시대 동안 공직에서 물러났다. 알리는 리다 전쟁과 초기 무슬림 정복에 참여하지 않았지만, 아부 바크르와 우마르에게 정부 및 종교 문제에 대한 조언을 제공하는 역할을 했다.

아부 바크르는 634년 사망하기 전에 우마르를 자신의 후계자로 지명했다. 이 임명에 대해 알리는 상의받지 못했으며, 일부 고위 동료들은 처음에는 이에 반대했다. 알리는 이 시기에 어떠한 주장도 하지 않고 우마르의 칼리파 시대 동안 공적 업무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마르는 특정 문제에 대해 알리와 상의했다. 예를 들어, 이슬람력의 시작으로 메디나로의 이주()를 채택하자는 아이디어는 알리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알리의 정치적 조언은 아마도 무시되었을 것이다. 우마르는 이슬람 선례에 따라 과도한 국고 수입을 분배하기 위해 국가 등록부()를 고안했지만, 알리는 무함마드와 아부 바크르의 관례에 따라 그러한 수입이 무슬림에게 동등하게 분배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알리는 또한 다마스쿠스 근처에서 열린 저명 인사들의 전략 회의에 불참했다. 알리는 우마르의 군사 원정에 참여하지 않았지만, 이에 대해 공개적으로 반대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644년 사망하기 전, 우마르는 차기 칼리프를 스스로 선택하도록 소규모 위원회를 구성했다. 이 위원회에서 알리와 우스만이 가장 강력한 후보였으며, 위원들은 모두 무함마드의 초기 동료들이자 쿠라이시 부족 출신이었다. 심의 끝에 압드 알라흐만 이븐 아우프는 처남인 우스만을 차기 칼리프로 임명했는데, 우스만이 처음 두 칼리프의 선례를 따르겠다고 약속했기 때문이다. 반면에 알리는 이 조건을 거부했거나, 모호한 답변을 했다. 안사르는 위원회에 대표되지 않았으며, 이는 분명히 우스만에게 편향되어 있었다.

우스만은 족벌주의, 부패, 그리고 불의로 널리 비난받았다. 알리 또한 우스만의 행실, 특히 그의 친족들에게의 사치스러운 선물에 대해 비판했다. 알리는 또한 아부 다르와 암마르와 같이 솔직한 동료들을 보호했으며, 전반적으로 우스만에게 자제력을 행사했다. 알리의 일부 지지자들은 반대 운동의 일원이었고, 무함마드의 고위 동료인 탈하와 주바이르, 그리고 그의 미망인 아이샤가 그들의 노력에 동참했다.

그들의 불만이 커지면서, 656년 지방 반대자들이 메디나로 쏟아져 들어왔다. 이집트 반대파는 알리에게 조언을 구했고, 알리는 그들에게 우스만과 협상할 것을 촉구했다. 알리는 마찬가지로 이라크 반대파에게 폭력을 자제할 것을 요청했고, 그들은 이에 따랐다. 그는 또한 우스만과 반대파 사이에서 경제적, 정치적 불만을 해결하기 위해 여러 차례 중재했다. 특히, 알리는 첫 번째 포위를 종식시킨 협정을 협상하고 보장했다. 이집트 반군들은 그들의 처벌을 명령하는 공식 서신을 가로챘을 때 우스만의 거주지를 두 번째로 포위했다. 그들은 칼리프의 퇴위를 요구했지만 그는 거부했고, 서신에 대한 자신의 무죄를 주장했다. 알리 또한 우스만을 지지했지만, 칼리프는 겉으로 보기에 그를 서신에 대해 비난했다. 이것이 아마도 알리가 우스만을 위해 더 이상 중재하는 것을 거부했을 때일 것이다. 우스만은 그 직후 이집트 반군에 의해 암살당했다. 알리는 치명적인 공격에 아무런 역할을 하지 않았으며, 그의 아들 하산은 알리의 요청에 따라 우스만의 포위된 거주지를 경비하다가 부상을 입었다. 그는 또한 반군이 포위 기간 동안 우스만에게 물을 전달하도록 설득했다.

아라비아 반도 통일을 이룩한 아부 바크르는 634년에 병사하고, 무함마드의 아내 중 한 명인 하프사의 아버지 우마르가 후계자로 지명되었다. 우마르는 중앙 집권적인 이슬람 제국을 건설했고, 642년의 니하반드의 전투에서 사산 왕조를 멸망 직전까지 몰아넣었지만, 644년에 노예에게 찔려 중상을 입고, 죽기 전에 유력자들을 모아 후계자를 선택하게 하고 사망했다. 이때 후계 후보에는 알리도 포함되어 있었지만, 후계 칼리프로 선출된 것은, 무함마드의 두 딸 루카이야와 움무 쿨숨을 아내로 둔 우스만이었다. 우스만은 650년경 꾸란(코란)의 정전(우스만 판)을 선택하게 했고, 651년에 사산 왕조를 완전히 멸망시키는 등의 공적을 세웠다. 아부 바크르, 우마르, 우스만, 그리고 그 다음 칼리프가 된 알리의 4대를 정통 칼리파라고 한다.

2. 5. 제4대 칼리프 즉위와 내란

알리는 656년에 우스만이 이집트 반군에게 암살당한 후 칼리프 직을 계승했다. 우마이야 가문은 메디나에서 도망쳤고, 지방 반군과 안사르가 도시를 장악했다. 이집트인들 사이에서는 탈하가 어느 정도 지지를 받았지만, 이라크인들과 대부분의 안사르는 알리를 지지했다. 무하지룬의 다수와 주요 부족 지도자들 또한 알리를 선호하여 칼리프 직을 제안했고, 알리는 잠시 망설인 후 공개적으로 취임 선서를 했다. 말리크 알 아슈타르가 알리에게 충성을 맹세한 첫 번째 사람이었을 것이다. 칼리프 직을 열망했던 탈하와 주바르도 알리에게 충성을 맹세했지만, 나중에 맹세를 깨뜨렸다. 알리는 누구에게도 강요하지 않았을 것이며, 폭력의 증거도 거의 없다.

알리가 충성을 서약받는 모습, Maktel-i Ali resular의 필사본에서, 16세기 말 또는 17세기 초


알리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모습, 동일 출처


알리는 암살로 인한 권력 공백을 메웠지만, 그의 선출은 정식 절차를 거치지 않았고 의회가 없었음에도 메디나에서 대중의 반대에 거의 직면하지 않았다. 그러나 반군이 그를 지지한 것은 우스만 암살에 알리가 연루되었다는 비난을 받게 했다. 소외된 집단이 알리 주변에 결집했지만, 그는 쿠라이시 부족 사이에서는 지지가 제한적이었는데, 그들 중 일부는 칼리파 자리를 열망했다. 알리는 무함마드의 친족이 지도력을 갖는다는 신성한 특권을 옹호했는데, 이는 쿠라이시의 정치적 야망을 위태롭게 했다.

무슬림 내전 동안, 알리는 병사들에게 약탈을 금지하고 세입으로 급여를 지급했으며, 승리 후에도 적들을 용서했다. 이러한 관행은 나중에 이슬람 율법에 명시되었다. 알리는 지휘관 알-아쉬타르에게 평화 요청을 거부하거나 협정을 위반하지 말고, 적대 행위를 시작하지 말라고 조언했다. 또한 민간인을 괴롭히거나 부상자와 도망자를 죽이는 행위, 시체 훼손, 허가 없는 가택 침입, 약탈, 여성에 대한 위해를 금지했다. 그는 승리 후 여성의 노예화를 막았으며, 시핀 전투 전에는 보복하지 않고 적들이 식수에 접근하도록 허용했다.

아이샤는 알리가 칼리프 자리에 오른 직후 알리에 반대하는 공개 운동을 벌였다. 그녀는 메카에서 탈하, 주바이르와 합류했고, 이들은 알리에 대한 이전의 충성 서약을 깨뜨렸다. 이들은 우스만의 암살범 처벌을 요구하고 알리가 암살에 공모했다고 비난하며, 알리의 퇴임을 요구하고 그의 후임자를 임명하기 위한 쿠라이쉬 의회 소집을 요구했다. 이들은 히자즈에서 충분한 지지를 얻지 못하고 바스라를 점령했다. 알리는 쿠파에서 군대를 소집하여 바스라 외곽에 진을 쳤고, 3일간의 협상이 실패한 후 656년 12월에 낙타 전투가 벌어졌다.

《Siyer-i nebiar》 사본에 묘사된 낙타 전투


반군은 적대 행위를 시작했고, 아이샤는 붉은 낙타 위에 갑옷을 입은 들것을 타고 전장에 있었다. 탈라는 우스만의 비서인 마르완에게 살해되었고, 주바이르는 전투 시작 직후 탈영했다가 쫓겨 살해되었다. 알리가 승리했고, 아이샤는 존경받으며 헤자즈로 호송되었다. 알리는 공개 사면을 발표하고 전쟁 포로를 석방했으며, 압류된 재산을 반환하고 쿠파에 자리를 잡았다.

제1차 피트나 지도; 알리의 지배하에 있는 녹색 영토; 무아위야의 지배하에 있는 분홍색 영토.


타리크나마에 묘사된 시핀 전투 중 알리와 무아위야 군대 간의 전투


시리아의 총독 무아위야는 알리가 부패하고 부적합하다고 여겨 해임 통보를 받았다. 무아위야는 우스만의 사촌으로서 알리가 살인을 저질렀다고 비난하고 복수를 요구하는 선전전을 시리아 전역에서 시작했다. 무아위야는 암르 이븐 알-아스와 연합하여 우마이야 왕조를 지원하기로 약속했다. 무아위야는 알리에게 시리아와 이집트를 돌려주는 대가로 칼리파 직을 인정하겠다고 제안했지만, 알리는 거절했다. 무아위야는 알리가 살인을 저질렀다고 비난하며 알리의 퇴위와 시리아 의회에서 다음 칼리프를 선출할 것을 요구하며 전쟁을 선포했다.

657년 여름, 알리와 무아위야의 군대는 유프라테스 강 서쪽의 시핀에 진을 쳤다. 양측은 협상했지만 소용이 없었고, 657년 7월 26일부터 주요 전투가 벌어졌다. 알리는 최전선에서 병사들과 함께 싸웠지만, 무아위야는 정자에서 지휘하며 알리와의 결투 제안을 거절했다. 알리를 위해 싸우다 죽은 사람 중에는 암마르가 있었다. 전투는 시리아인들이 창에 꾸란 페이지를 들고 "신의 책이 우리를 심판하게 하라"고 외치자 중단되었다. 알리는 싸울 것을 촉구했지만, 쿠파의 qurraar와 리다 전쟁ar 부족민들은 중재에 응하지 않으면 반란을 일으키겠다고 위협했다. 알리는 중재 제안을 받아들였다.

무아위야는 양측 대표가 꾸란적인 해결책을 찾을 것을 제안했다. 무아위야는 암르를 대표로 내세웠고, 알리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의 진영은 아부 무사를 압박했다. 657년 8월 2일, 중재 협정이 작성되고 서명되었으며, 두 대표는 중립 지역에서 만나 꾸란과 순나를 준수하며 평화를 회복해야 했다. 양 군대는 전장을 떠났다. 중재 협정은 알리의 진영을 분열시켰고, 무아위야의 입지를 강화했다.

두 중재인은 658년 2월 두마트 알-잔달에서 만나 우스만이 부당하게 살해되었고 무아위야에게 복수를 요구할 권리가 있다는 판결에 도달했지만, 다른 것에는 동의하지 못했다. 알리는 두 중재인의 행동이 꾸란에 위배된다고 비난하고 두 번째 시리아 원정을 조직하기 시작했다. 우드루에서 열린 두 번째 회담도 실패했다. 암르는 무아위야를, 아부 무사는 압드 알라 이븐 우마르를 지명했지만, 그는 물러났다. 회의가 끝나자 아부 무사는 무아위야와 알리를 폐위시키고 협의회를 소집했지만, 암르는 알리를 폐위시키고 무아위야를 후계자로 임명했다. 중재는 실패했고, 시리아인들의 무아위야 지지를 강화하고 알리의 입지를 약화시켰다.

나흐라반 전투 이후, 알리는 시리아에 대한 두 번째 원정을 위한 충분한 지원을 모으지 못했다. 병사들의 사기가 저하되었고, 부족 지도자들은 무아위야에게 매수되었다. 알리는 원칙상 부족 지도자들에게 재정적 특혜를 부여하지 않았다. 알리는 658년에 이집트를 무아위야에게 잃었고, 무아위야는 군대를 파견하여 민간인들을 공격했다. 알리는 661년 늦겨울 시리아에 대한 두 번째 공세를 위한 지원을 확보했지만, 알리의 암살로 계획이 중단되었다.

한편, 알리와 무함마드의 아내 아이샤는 사이가 좋지 않았다. 아리는 아이샤가 사막에서 길을 잃고 무슬림 남성과 성관계를 가졌다고 비난하는 중심 인물 중 한 명이었다. 꾸란의 계시로 아이샤의 무죄가 확정되었지만, 이 사건은 아리와 아이샤 사이에 갈등을 남겼다. 아리는 아이샤에 대한 증오를 공공연히 드러냈고, 아이샤는 아리의 이름을 입에 담는 것조차 싫어했다. 아이샤는 아리가 칼리프로 선출되자 "아리가 그렇게 되기 전에 하늘이 땅에 닿으면 좋겠다"고 말했고, 아리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알라에게 감사했다.

2. 6. 하와리즈파의 등장과 알리의 암살

알리의 추종자 중 일부는 중재 협정에 항의하며 그를 떠났는데, 이들은 하와리즈파()로 알려졌다. 이들은 알나흐라완 마을에 모여 알리에게 대항하였고, 결국 나흐라완 전투에서 알리와 맞섰다. 하와리즈파는 "신의 심판 외에는 없다"는 슬로건을 내걸고 중재를 거부했는데, 알리는 이를 통치자의 필요성을 부정하는 행위로 간주했다.

나흐라반 전투, Maqtel-i Ali resular 사본에서 발췌, 16세기 말 또는 17세기 초


중재 이후 무아위야는 시리아인들로부터 칼리프로서 충성을 받았다. 알리는 새로운 시리아 원정을 준비했지만, 하와리즈파의 민간인 학살 소식을 듣고 나흐라반으로 진군했다. 알리는 하와리즈파의 많은 사람들을 설득하여 이탈시켰으나, 남은 병력과 658년 7월 17일 또는 657년에 전투를 벌여 승리했다. 이 전투는 한때 동맹이었던 이들을 죽였다는 비판을 받았지만, 폭력적인 반역자들을 제압하는 것은 불가피했다는 의견도 있었다.

나흐라반 전투 이후 알리는 시리아에 대한 두 번째 원정을 위한 충분한 지원을 받지 못했고, 658년에 이집트를 무아위야에게 잃었다. 무아위야는 각지에 군대를 파견하여 민간인을 공격했고, 알리는 이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했다. 알리는 661년 늦겨울 시리아 공격을 위한 지원을 확보했으나, 알리의 암살로 계획은 중단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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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리는 661년 1월 28일(이슬람력 40년 라마단 19일) 쿠파 대사원에서 아침 기도 중에 이븐 물잠에게 암살당했다. 그는 이틀 뒤 사망했으며, 동해복수법에 따라 이븐 물잠은 하산에 의해 처형되었다. 알리의 매장 장소는 비밀로 유지되었으며, 나자프의 이맘 알리 사원과 마자르의 알리 사원 등이 후보지로 거론된다.

무아위야는 660년에 스스로 칼리프를 칭했고, 하와리즈파는 알리, 무아위야, 암르 이븐 알 아스를 암살하려 했다. 알리는 내부 분열로 인해 쇠약해졌으며, 무아위야에 비해 전략과 정략에서 미흡했다. 알리는 쿠파 대사원에서 암살당했고, 무아위야는 우마이야 왕조를 열었다. 알리의 지지자들은 하산과 후세인을 이맘으로 받들며 시아파를 형성했고, 우마이야 왕조를 인정한 다수파는 수니파로 불리게 되었다.

3. 알리의 유산과 이슬람 분파

알리의 첫 번째 결혼은 파티마와의 사이에서 하산, 후세인, 그리고 무흐신 세 아들을 낳았다.[3] 무흐신은 유아기에 사망했거나, 파티마가 왕위 계승 위기 동안 그녀의 집에 대한 습격으로 부상을 입었을 때 유산했다.[4] 하산과 후세인의 후손들은 각각 하사니드와 후사이니드로 알려져 있다.[5] 무함마드의 자손으로서, 그들은 샤리프ar사이드ar와 같은 귀족 칭호로 무슬림 공동체에서 존경받는다.[6] 알리와 파티마는 또한 두 딸, 자이납과 움 쿨섬을 두었다.[7] 632년 파티마의 죽음 이후 알리는 여러 번 재혼하여 무함마드 알 아와삿과 아바스 이븐 알리를 포함한 더 많은 자녀를 두었다.[7] 알리는 평생 동안 17명의 딸과 11명, 14명 또는 18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그중 하산, 후세인, 그리고 무함마드 이븐 알하나피야는 역사적인 역할을 했다.[8] 알리의 후손들은 알리 가문으로 알려져 있다.[5]

무아위야는 661년에 알리를 계승하여 왕조인 우마이야 칼리파국을 세웠으며, 그 동안 알리 가문은 심하게 박해받았다.[7] 알리 이후, 그의 추종자들 (시아ar)은 그의 장남 하산을 그들의 이맘으로 인정했다. 그는 670년에 사망했는데, 아마도 무아위야의 사주로 독살되었을 것이며, 시아 공동체는 하산의 남동생 후세인을 따랐고, 후세인은 680년 카르발라 전투에서 많은 친척들과 함께 우마이야 군대에 의해 살해당했다.[5] 카르발라 학살에 대한 복수로, 곧 685년에 이븐 알하나피야를 대표한다고 주장하는 알무크타르의 시아 반란이 뒤따랐다.[5] 이 반란 이후의 주요 운동은 현재 사라진 카이산파와 이맘파였다.[9] 카이산파는 대부분 이븐 알하나피야의 아들인 아부 하심을 따랐다. 아부 하심이 716년경에 사망했을 때, 이 그룹은 무함마드의 삼촌 압바스의 후손인 아바스 왕조와 크게 연합했다.[5][10] 반면에 이맘파는 후세인의 유일한 생존 아들인 알리 자인 알 아비딘 ()을 통해 후세인의 조용한 후손들이 이끌었다. 예외는 알리의 아들 자이드였는데, 그는 740년경 우마이야 왕조에 대항하여 실패한 반란을 이끌었다.[5] 자이드파로 알려진 그의 추종자들에게는 폭정에 맞서 일어선 배운 하사니드 또는 후사이니드는 이맘의 자격을 갖추었다.[10]

알리 가문은 또한 750년에 우마이야 왕조를 무너뜨린 아바스 왕조 치하에서 박해를 받았다.[5][10] 따라서 알리 가문의 일부는 반란을 일으켰고, 일부는 외딴 지역에 지역 왕조를 세웠다.[3][5][11] 특히, 아바스 왕조는 투옥 또는 감시를 통해 이맘파의 이맘들을 공적인 삶에서 제거했으며, 그들이 이맘들의 죽음에 책임이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12][13] 주류 이맘파는 십이 이맘파의 선구자였으며, 그들은 열두 번째이자 마지막 이맘인 무함마드 알 마흐디가 868년경에 태어났지만, 박해의 두려움 때문에 874년에 대중에게 숨겨졌다고 믿는다. 그는 부정이 사라지고 악이 근절될 세상의 종말에 다시 나타날 때까지 신의 뜻에 따라 은둔 상태로 남아 있다.[14] 이맘파 내에서 일어난 유일한 역사적인 분열은 그들의 여섯 번째 이맘인 자파르 알사디크가 765년에 사망했을 때 일어났다.[5] 일부는 그의 지명된 후계자가 알사디크보다 먼저 사망한 그의 아들 이스마일이라고 주장했다. 이들은 10세기 초에 정치적 성공을 거둔 이스마일파의 선구자였으며, 이집트의 파티마 칼리파국바레인의 카르마티아파와 같은 정치적 성공을 거두었다.

드루즈 신앙에서 알리는 플라톤소크라테스와 같이 "소선지자"로 여겨진다. 비록 이 신앙이 원래 이스마일파에서 파생되었지만, 드루즈는 무슬림이 아니며 이슬람의 5대 기둥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야르산교에서는 쿠르드족 신비주의자 술탄 사하크가 창시한 종교로, 알리를 신의 화신으로 여기며 무함마드보다 우월하다고 여긴다. 그러나 이들을 굴라트 (극단주의자ar) 시아파의 분파로 보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그는 유일하게 수니파시아파 양쪽으로부터 공인된 지도자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란-이라크 전쟁에서 수니파 이라크 병사들은 알리의 초상을 '부적 대용'으로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시아파 이란인들도 '알리의 초상'에는 총구를 겨누지 못한다. 게다가 수니파 자체의 신앙에도 반하지 않는다).

솔로몬 왕의 반지, 아담의 셔츠, 모세의 지팡이를 가지고 있었다고 전해진다.

== 시아파와 수니파의 분열 ==

632년 고별 순례에서 돌아오는 길에 무함마드는 순례자들을 가디르 쿰에 세우고 공동 기도 후 연설했다. 기도 후, 무함마드는 쿠란과 그의 아흘 알-바이트/ahl al-Baytar (집의 사람들ar, 그의 가족)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알리의 손을 잡고 무함마드는 신자들에게 자신이 그들보다 아울라/awlaar (더 가깝다/더 큰 권한을 가지다ar)인지 물었다. 이는 쿠란 33:6절을 언급한 것이다. 그들이 동의하자, 무함마드는 "내가 마울라/mawlaar인 자의, 알리가 그의 마울라/mawlaar이다."라고 선언했다. 무스나드 아마드 이븐 한발에 따르면, 무함마드는 이 말을 여러 번 반복했고, 우마르는 알리를 축하하며 "이제 당신은 모든 신실한 남성과 여성의 마울라/mawlaar가 되었습니다."라고 말했다. 무함마드는 이전에 무슬림들에게 자신의 임박한 죽음에 대해 알렸다.

가디르 쿰 사건의 진실성은 거의 논쟁의 여지가 없으며, 고전 이슬람 자료에서 "가장 광범위하게 인정되고 입증된" 보고서 중 하나이다. 그러나 ''마울라/mawlaar''는 다의어 아랍어 단어이며, 가디르 쿰에서의 그 해석은 종파에 따라 나뉜다. 시아파는 ''마울라/mawlaar''를 '지도자', '주인', '후원자'로 해석하는 반면, 수니파는 알리에 대한 사랑이나 지지로 해석한다. 시아파는 가디르 쿰을 알리가 무함마드의 종교적, 정치적 권위를 부여받은 것으로 간주하는 반면, 수니파는 이를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한 진술로 간주하거나, 알리가 무함마드의 유언을 실행해야 함을 나타내는 것으로 간주한다. 시아파는 이 발표의 특별한 성격을 지적하고, 쿠란 및 텍스트 증거를 제시하며, 권위 외에 하디스에서 마울라/mawlaar의 다른 의미를 제거하려 노력하는 반면, 수니파는 알리에 대한 이전의 불만을 해결하는 것으로 묘사하여 가디르 쿰의 중요성을 최소화한다. 칼리파 시절에 알리는 무슬림들에게 가디르 쿰에 대한 증언을 제시해 달라고 요청했으며, 이는 그의 정당성에 대한 도전에 대응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알리가 사망하자 그의 아들 하산쿠파에서 다음 칼리파로 인정받았다. 알리의 상속자로서 하산은 쿠파인들에게 명백한 선택이었는데, 특히 알리가 무함마드의 친족만이 지도권을 가질 독점적 권리가 있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무함마드의 생존한 동료들 대부분이 알리의 군대에 있었고, 그들 또한 하산에게 충성을 맹세했지만 전반적으로 하산에 대한 쿠파인들의 지지는 약했을 가능성이 높다. 하산은 이후 661년 8월, 무아위야가 대군을 이끌고 이라크로 진격해 오자 퇴위했다. 그리하여 무아위야는 세습적인 우마이야 칼리파조를 창건했다. 그는 통치 기간 내내 알리의 가족과 지지자들을 박해했고, 정기적으로 공개적으로 알리를 저주하도록 명령했다.

== 시아파에서의 알리 ==

알리는 이슬람 문화에서 무함마드 다음으로 숭배받는 인물로 여겨진다. 알리는 용기, 정직함, 이슬람에 대한 변함없는 헌신, 관대함, 그리고 모든 무슬림에 대한 평등한 대우로 존경받는다. 그의 추종자들에게 그는 부패하지 않은 이슬람과 이슬람 이전의 기사도의 전형이 되었다.

거울 글씨로 쓰인 "알리는 신의 대리인이다" (오스만, 1720–1730년경)


알리는 이슬람 전통에서 많은 존칭으로 알려져 있으며, 그 중 일부는 특히 시아파에서 사용된다. 그의 주요 쿤야]]/Kunya (Arabic)ar(테크노님ar)는 ʾAbū al-Ḥasan/''알-무르타다'' (선택되고 만족하는 자ar), ''아사드 알라'' (신의 사자ar), ''Ḥaydar'' (사자ar, 원래 그의 어머니가 그에게 지어준 이름), ''아미르 알무미닌'' (신앙인의 지휘관' 또는 '신앙인의 왕자ar), 그리고 ''이맘 알무타킨'' (경건한 자의 지도자ar)이 있다. 특히, 십이 이맘파는 아미르 알무미닌이라는 칭호가 알리에게 고유하다고 여긴다. 그는 또한 ''아부 투라브'' (먼지의 아버지ar)라고도 불리며, 이는 처음에는 그의 적들이 사용한 경멸적인 표현일 수도 있다.

알리와 관련된 쿠란에서 가장 논쟁적인 진술일 수 있는 walayaar 구절이 셀주크 시대의 기념비의 가장자리에 새겨져 있다.


알리는 쿠란의 율법과 일반적으로 관련된 임무에서 정기적으로 무함마드를 대표했다. 예를 들어, walayaar의 구절(5:55)은 알리가 모스크에서 기도하는 동안 거지에게 반지를 준 것에 대한 언급이며, 시아파와 일부 수니파의 설명에 따른다. 만약 그렇다면, 이 구절은 알리에게 무함마드와 동일한 영적 권위(walayaar)를 부여한다. 시아파 자료에서, tabligh의 구절ar(5:67)은 무함마드가 가디르 쿰에서 알리를 자신의 후계자로 지명하도록 자극했으며, ikmal al-din의 구절ar(5:3)은 그 후 이슬람의 완성을 선언했다. 정화의 구절(33:33)은 Ahl al-Bayt(집의 사람들ar)의 순결 상태와 관련이 있으며, 시아파와 일부 수니파 자료에서 알리, 파티마, 그리고 그들의 두 아들로 제한된다. Ahl al-Bayt에 대한 또 다른 언급은 mawaddaar의 구절(42:23)일 수 있다. 시아파에게 이 구절은 Ahl al-Bayt를 사랑하고 따르라는 쿠란의 명령이다.

무함마드는 알리의 자질을 자주 칭찬했다. 가장 논란이 많은 발언은 "내가 그의 mawlaar(주인ar)인 자는 알리가 그의 mawlaar이다"라는 말로, 가디르 쿰에서 행해졌다. 시아파에 따르면, 이것은 알리에게 무함마드와 동일한 영적 권위(walayaar)를 부여했다. 지위의 하디스에서 무함마드와 알리를 모세와 아론에 비유하여, 시아 이슬람에서 알리가 무함마드의 뒤를 이을 권리를 찬탈했음을 지지한다. 시아파수니파의 표준 하디스 모음집에는 다음과 같은 예가 있다. "알리보다 용감한 젊은이는 없다", "알리를 사랑하는 자는 신자뿐이며, 알리를 미워하는 자는 위선자(munafiqar)뿐이다", "나는 알리에게서 왔고 알리는 나에게서 왔으며, 그는 내 뒤에 모든 신자의 waliar (후원자, 수호자ar)이다", "진실은 그[알리]가 가는 곳마다 그를 중심으로 돈다", "나는 지식의 도시이고 알리는 그 문(babar)이다", "알리는 쿠란과 함께 있고 쿠란은 알리와 함께 있다. 그들은 [천국의] 연못에서 나에게 돌아올 때까지 분리되지 않을 것이다."

알리 이븐 아비 탈리브는 수니파시아파 이슬람 모두에서 신비주의적이고 영적인 흐름의 공통적인 근원이다. 특히 알리는 일부 수피 운동의 영적 지도자이며, 수피들은 알리가 무함마드로부터 그의 비전적 지식과 성스러운 권위를 물려받았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 지식과 권위는 신자들이 하느님을 향한 여정을 안내한다. 거의 모든 수피 교단은 알리를 통해 무함마드까지 혈통을 거슬러 올라가는데, 나크쉬반디 교단은 아부 바크르를 통해 무함마드에 이른다는 점에서 예외이다.

알리와 그의 아들들, 19세기 이란 태피스트리


알리는 시아 이슬람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한다: 아랍어 단어 '시아'(shi'a) 자체는 '알리의 시아'(알리의 추종자ar)를 줄인 말이며, 그의 이름은 매일 드리는 기도(adhan)에 포함되어 있으며, 무함마드의 가장 중요한 동료로 여겨진다. 시아 이슬람의 핵심 교리는 알리가 신성하게 지정되어 무함마드의 정당한 후계자였다는 것이며, 이는 주로 가디르 쿰에 대한 언급이다. 알리는 656년 칼리파가 되기 전부터 무함마드의 정치적, 종교적 권위를 물려받았다고 여겨진다. 특히, 알리의 전임자들은 그의 권리를 찬탈한 불법적인 통치자로 여겨진다. 시아 무슬림과 그들의 이맘(그리고 이맘으로서의 무함마드) 사이의 모든 것을 포괄하는 충성의 유대는 '왈라야'(walayaar)로 알려져 있다. 알리는 또한 중재의 특권을 심판의 날에 부여받았다고 여겨진다. 초창기에는 일부 시아파가 알리에게 신성을 부여하기도 했지만, 그러한 극단적인 견해는 점차 시아파에서 뿌리 뽑혔다.

시아의 믿음에 따르면, 알리는 또한 무함마드의 난해한 지식을 물려받았는데, 예를 들어, "나[무함마드]는 지식의 도시이고, 알리는 그 문이다"라는 예언적 하디스를 볼 때 그렇다. 따라서 알리는 무함마드 다음으로 쿠란의 해석자이며, (난해한) 가르침의 유일한 권위 있는 원천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무함마드와 달리, 알리는 신성한 계시(wahyar)를 받지 않았다고 여겨지지만, 그는 신성한 영감(ilhamar)의 인도를 받았을 수 있다. 쿠란 21:73절은 때때로 여기에서 인용되는데, "우리는 그들을 이맘으로 만들었고, 우리의 명령에 따라 인도했으며, 그들에게 선행, 기도의 유지, 자카트(zakatar) (자선ar)를 수행하도록 계시했고, 그들은 우리를 숭배했다." 시아 무슬림은 또한 무함마드와 마찬가지로 알리의 무오류성을 믿는데, 이는 죄로부터의 신성한 보호를 의미한다. 여기서, 정화의 구절이 때때로 인용된다. 따라서 알리의 말과 행동은 시아 공동체의 모범이자 그들의 종교적 훈령의 원천으로 여겨진다.

이맘 알리 사원의 내부 모습


알라위파는 12명의 이맘 중 첫 번째인 알리를 신의 물리적 현현으로 숭배한다. 알라위파 신앙의 증언(''샤하다'')은 "알리 외에 다른 신은 없다"로 번역된다. 알라위파 삼위일체는 신이 세 가지 뚜렷한 현현, 즉 ''마'나'' (의미ar), ''이스므'' (이름ar), ''밥'' (문ar)으로 구성된다고 보며, 이들은 함께 "분리될 수 없는 삼위일체"를 이룬다. ''마'나''는 알라위파 신화에서 "만물의 근원과 의미"를 상징한다. 알라위파 교리에 따르면, ''마'나''는 ''이스므''를 생성했고, ''이스므''는 다시 ''밥''을 창조했다. 이러한 믿음은 삼위일체의 환생에 대한 알라위파 교리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알라위파 삼위일체의 최종 환생은 알리(''마'나''), 무함마드(''이스므''), 살만 알 파르시(''밥'')로 구성된다. 알라위파는 그들을 각각 하늘, 태양, 달로 묘사한다. 알라위파는 알리를 우주를 건설한 "신의 마지막이자 최고의 현현"으로 숭배하고, 그에게 신성한 우월성을 부여하며, 알리가 무함마드를 창조하여 그에게 지구에 쿠란의 가르침을 전파할 사명을 부여했다고 믿는다.

시아파는 알리가 무함마드로부터 직접 후계자로 임명되었다고 주장하며, 아부 바크르, 우마르, 우스만의 3대 정통 칼리파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다(그들을 찬탈자라고 하여 저주의 대상으로 삼기도 한다). 그리고 지도자로서 예언자 무함마드의 혈통을 잇는 것을 중시하며, 무함마드의 딸 파티마와 알리 사이에서 태어난 하산, 후세인을 각각 제2대, 제3대 이맘으로 삼는다(시아파 중 카이산파만은 알리와 다른 아내 하울라와의 아들 무함마드 이븐 하나피야를 제2대 이맘으로 삼는다). 일반적으로 하산이나 후세인의 혈통을 가진 사람들은 특히 "샤이크"나 "사이드"라고 불리며 종파를 불문하고 무슬림 사회에서 존경을 받지만, 사이드 자신도 예언자의 후예로서 사회로부터 존경을 받도록 몸가짐을 바르게 할 것을 요구받고 있으며, 시아파뿐만 아니라 사이드 자신이 울라마나 수피 교단의 샤이크 등 종교적 직책을 맡는 것도 일반적이었다. 이드리스 왕조나 파티마 왕조, 사파비 왕조처럼 경우에 따라서는 무함마드의 후예를 칭하는 사람들이 정권을 담당하는 경우도 많았다. 파티마 왕조는 이스마일파의 신앙 규범을 정비하고 시아파 왕조로서의 정통성을 주장했으며, 사파비 왕조도 신비주의 교단에서 발흥하여 12이맘파를 이라크, 이란 전역에 침투시켜 현재 이란 주변의 시아파 세력의 기반을 만들었다. 무함마드의 자녀 중 많은 이들이 요절했고, 무함마드의 혈통은 파티마를 통해서만 남겨졌기 때문에, 무함마드의 혈통을 잇는다는 것은 하산 또는 후세인의 자손이라는 것과 거의 같은 의미이다.

이슬람교 안에서도 특히 시아파에서는 무함마드가 무오류하다고 여겨지며, 알리를 포함한 후계 이맘들에게도 그 무오류성이 계승되었다고 본다. 따라서 시아파수니파하디스 중, 알리가 아부 바크르나 우마르, 우스만보다 열등했다는 하디스 등에 관해, 수니파가 알리로부터 칼리파의 자리를 찬탈한 것을 합법화하기 위해 위조된 것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다.

== 수니파에서의 알리 ==

알리는 이슬람 문화에서 무함마드 다음으로 숭배받는 인물로 여겨진다. 알리는 용기, 정직함, 이슬람에 대한 변함없는 헌신, 관대함, 그리고 모든 무슬림에 대한 평등한 대우로 존경받는다. 그의 추종자들에게 그는 부패하지 않은 이슬람과 이슬람 이전의 기사도의 전형이 되었다.

아랍 서예로 새겨진 '알리'라는 단어가 터키 아야 소피아에 새겨져 있다.


알리 이븐 아비 탈리브(19세기 그림)


수니파 이슬람에서 알리는 무함마드의 가까운 동료, 쿠란과 이슬람 율법에 대한 최고의 권위자, 수니 영성의 지혜의 근원으로 여겨진다. 632년 예언자가 사망했을 때, 알리는 가디르 쿰에 대한 언급일 수도 있는 지도력에 대한 주장을 제기했지만, 결국 무슬림의 단결을 위해 처음 세 명의 칼리파의 세속적 통치를 받아들였다. 수니 자료에서 알리는 첫 세 명의 칼리파의 신뢰받는 조언자로 묘사되며,3. 1. 시아파와 수니파의 분열 632년 고별 순례에서 돌아오는 길에 무함마드는 순례자들을 가디르 쿰에 세우고 공동 기도 후 연설했다. 기도 후, 무함마드는 쿠란과 그의 아흘 알-바이트/ahl al-Baytar (, 그의 가족)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알리의 손을 잡고 무함마드는 신자들에게 자신이 그들보다 아울라/awlaar ()인지 물었다. 이는 쿠란 33:6절을 언급한 것이다. 그들이 동의하자, 무함마드는 "내가 마울라/mawlaar인 자의, 알리가 그의 마울라/mawlaar이다."라고 선언했다. 무스나드 아마드 이븐 한발에 따르면, 무함마드는 이 말을 여러 번 반복했고, 우마르는 알리를 축하하며 "이제 당신은 모든 신실한 남성과 여성의 마울라/mawlaar가 되었습니다."라고 말했다. 무함마드는 이전에 무슬림들에게 자신의 임박한 죽음에 대해 알렸다.

가디르 쿰 사건의 진실성은 거의 논쟁의 여지가 없으며, 고전 이슬람 자료에서 "가장 광범위하게 인정되고 입증된" 보고서 중 하나이다. 그러나 ''마울라/mawlaar''는 다의어 아랍어 단어이며, 가디르 쿰에서의 그 해석은 종파에 따라 나뉜다. 시아파는 ''마울라/mawlaar''를 '지도자', '주인', '후원자'로 해석하는 반면, 수니파는 알리에 대한 사랑이나 지지로 해석한다. 시아파는 가디르 쿰을 알리가 무함마드의 종교적, 정치적 권위를 부여받은 것으로 간주하는 반면, 수니파는 이를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한 진술로 간주하거나, 알리가 무함마드의 유언을 실행해야 함을 나타내는 것으로 간주한다. 시아파는 이 발표의 특별한 성격을 지적하고, 쿠란 및 텍스트 증거를 제시하며, 권위 외에 하디스에서 마울라/mawlaar의 다른 의미를 제거하려 노력하는 반면, 수니파는 알리에 대한 이전의 불만을 해결하는 것으로 묘사하여 가디르 쿰의 중요성을 최소화한다. 칼리파 시절에 알리는 무슬림들에게 가디르 쿰에 대한 증언을 제시해 달라고 요청했으며, 이는 그의 정당성에 대한 도전에 대응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알리가 사망하자 그의 아들 하산이 쿠파에서 다음 칼리프로 인정받았다. 알리의 상속자로서 하산은 쿠파인들에게 명백한 선택이었는데, 특히 알리가 무함마드의 친족만이 지도권을 가질 독점적 권리가 있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무함마드의 생존한 동료들 대부분이 알리의 군대에 있었고, 그들 또한 하산에게 충성을 맹세했지만 전반적으로 하산에 대한 쿠파인들의 지지는 약했을 가능성이 높다. 하산은 이후 661년 8월, 무아위야가 대군을 이끌고 이라크로 진격해 오자 퇴위했다. 그리하여 무아위야는 세습적인 우마이야 칼리파조를 창건했다. 그는 통치 기간 내내 알리의 가족과 지지자들을 박해했고, 정기적으로 공개적으로 알리를 저주하도록 명령했다.

3. 2. 시아파에서의 알리

알리(Ali)는 이슬람 문화에서 무함마드 다음으로 숭배받는 인물로 여겨진다. 알리는 용기, 정직함, 이슬람에 대한 변함없는 헌신, 관대함, 그리고 모든 무슬림에 대한 평등한 대우로 존경받는다. 그의 추종자들에게 그는 부패하지 않은 이슬람과 이슬람 이전의 기사도의 전형이 되었다.

알리는 이슬람 전통에서 많은 존칭으로 알려져 있으며, 그 중 일부는 특히 시아파에서 사용된다. 그의 주요 쿤야]]/Kunya (Arabic)ar(테크노님)는 ʾAbū al-Ḥasan/''알-무르타다'' (), ''아사드 알라'' (), ''Ḥaydar'' (, 원래 그의 어머니가 그에게 지어준 이름), ''아미르 알무미닌'' (), 그리고 ''이맘 알무타킨'' ()이 있다. 특히, 십이 이맘파는 아미르 알무미닌이라는 칭호가 알리에게 고유하다고 여긴다. 그는 또한 ''아부 투라브'' ()라고도 불리며, 이는 처음에는 그의 적들이 사용한 경멸적인 표현일 수도 있다.

알리는 꾸란의 율법과 일반적으로 관련된 임무에서 정기적으로 무함마드를 대표했다. 예를 들어, walayaar의 구절(5:55)은 알리가 모스크에서 기도하는 동안 거지에게 반지를 준 것에 대한 언급이며, 시아파와 일부 수니파의 설명에 따른다. 만약 그렇다면, 이 구절은 알리에게 무함마드와 동일한 영적 권위(walayaar)를 부여한다. 시아파 자료에서, tabligh의 구절ar(5:67)은 무함마드가 가디르 쿰에서 알리를 자신의 후계자로 지명하도록 자극했으며, 집의 사람들/ikmal al-din의 구절}}(5:3)은 그 후 이슬람의 완성을 선언했다. 정화의 구절(33:33)은 Ahl al-Bayt({{Litar)의 순결 상태와 관련이 있으며, 시아파와 일부 수니파 자료에서 알리, 파티마, 그리고 그들의 두 아들로 제한된다. Ahl al-Bayt에 대한 또 다른 언급은 mawaddaar의 구절(42:23)일 수 있다. 시아파에게 이 구절은 Ahl al-Bayt를 사랑하고 따르라는 꾸란의 명령이다.

무함마드는 알리의 자질을 자주 칭찬했다. 가장 논란이 많은 발언은 "내가 그의 mawlaar(주인)인 자는 알리가 그의 mawlaar이다"라는 말로, 가디르 쿰에서 행해졌다. 시아파에 따르면, 이것은 알리에게 무함마드와 동일한 영적 권위(walayaar)를 부여했다. 지위의 하디스에서 무함마드와 알리를 모세와 아론에 비유하여, 시아 이슬람에서 알리가 무함마드의 뒤를 이을 권리를 찬탈했음을 지지한다. 시아파와 수니파의 표준 하디스 모음집에는 다음과 같은 예가 있다. "알리보다 용감한 젊은이는 없다", "알리를 사랑하는 자는 신자뿐이며, 알리를 미워하는 자는 위선자(munafiqar)뿐이다", "나는 알리에게서 왔고 알리는 나에게서 왔으며, 그는 내 뒤에 모든 신자의 waliar (후원자, 수호자)이다", "진실은 그[알리]가 가는 곳마다 그를 중심으로 돈다", "나는 지식의 도시이고 알리는 그 문(babar)이다", "알리는 꾸란과 함께 있고 꾸란은 알리와 함께 있다. 그들은 [천국의] 연못에서 나에게 돌아올 때까지 분리되지 않을 것이다."

알리 이븐 아비 탈리브는 수니파와 시아파 이슬람 모두에서 신비주의적이고 영적인 흐름의 공통적인 근원이다. 특히 알리는 일부 수피 운동의 영적 지도자이며, 수피들은 알리가 무함마드로부터 그의 비전적 지식과 성스러운 권위를 물려받았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 지식과 권위는 신자들이 하느님을 향한 여정을 안내한다. 거의 모든 수피 교단은 알리를 통해 무함마드까지 혈통을 거슬러 올라가는데, 나크쉬반디 교단은 아부 바크르를 통해 무함마드에 이른다는 점에서 예외이다.

알리는 시아 이슬람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한다: 아랍어 단어 '시아'(shi'a) 자체는 '알리의 시아'()를 줄인 말이며, 그의 이름은 매일 드리는 기도(adhan)에 포함되어 있으며, 무함마드의 가장 중요한 동료로 여겨진다. 시아 이슬람의 핵심 교리는 알리가 신성하게 지정되어 무함마드의 정당한 후계자였다는 것이며, 이는 주로 가디르 쿰에 대한 언급이다. 알리는 656년 칼리파가 되기 전부터 무함마드의 정치적, 종교적 권위를 물려받았다고 여겨진다. 특히, 알리의 전임자들은 그의 권리를 찬탈한 불법적인 통치자로 여겨진다. 시아 무슬림과 그들의 이맘(그리고 이맘으로서의 무함마드) 사이의 모든 것을 포괄하는 충성의 유대는 '왈라야'(walayaar)로 알려져 있다. 알리는 또한 중재의 특권을 심판의 날에 부여받았다고 여겨진다. 초창기에는 일부 시아파가 알리에게 신성을 부여하기도 했지만, 그러한 극단적인 견해는 점차 시아파에서 뿌리 뽑혔다.

시아의 믿음에 따르면, 알리는 또한 무함마드의 난해한 지식을 물려받았는데, 예를 들어, "나[무함마드]는 지식의 도시이고, 알리는 그 문이다"라는 예언적 하디스를 볼 때 그렇다. 따라서 알리는 무함마드 다음으로 꾸란의 해석자이며, (난해한) 가르침의 유일한 권위 있는 원천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무함마드와 달리, 알리는 신성한 계시(wahyar)를 받지 않았다고 여겨지지만, 그는 신성한 영감(ilhamar)의 인도를 받았을 수 있다. 꾸란 21:73절은 때때로 여기에서 인용되는데, "우리는 그들을 이맘으로 만들었고, 우리의 명령에 따라 인도했으며, 그들에게 선행, 기도의 유지, 자카트(zakatar) (자선)를 수행하도록 계시했고, 그들은 우리를 숭배했다." 시아 무슬림은 또한 무함마드와 마찬가지로 알리의 무오류성을 믿는데, 이는 죄로부터의 신성한 보호를 의미한다. 여기서, 정화의 구절이 때때로 인용된다. 따라서 알리의 말과 행동은 시아 공동체의 모범이자 그들의 종교적 훈령의 원천으로 여겨진다.

알라위파는 12명의 이맘 중 첫 번째인 알리를 신의 물리적 현현으로 숭배한다. 알라위파 신앙의 증언(''샤하다'')은 "알리 외에 다른 신은 없다"로 번역된다. 알라위파 삼위일체는 신이 세 가지 뚜렷한 현현, 즉 ''마'나'' (의미), ''이스므'' (이름), ''밥'' (문)으로 구성된다고 보며, 이들은 함께 "분리될 수 없는 삼위일체"를 이룬다. ''마'나''는 알라위파 신화에서 "만물의 근원과 의미"를 상징한다. 알라위파 교리에 따르면, ''마'나''는 ''이스므''를 생성했고, ''이스므''는 다시 ''밥''을 창조했다. 이러한 믿음은 삼위일체의 환생에 대한 알라위파 교리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알라위파 삼위일체의 최종 환생은 알리(''마'나''), 무함마드(''이스므''), 살만 알 파르시(''밥'')로 구성된다. 알라위파는 그들을 각각 하늘, 태양, 달로 묘사한다. 알라위파는 알리를 우주를 건설한 "신의 마지막이자 최고의 현현"으로 숭배하고, 그에게 신성한 우월성을 부여하며, 알리가 무함마드를 창조하여 그에게 지구에 쿠란의 가르침을 전파할 사명을 부여했다고 믿는다.

시아파는 알리가 무함마드로부터 직접 후계자로 임명되었다고 주장하며, 아부 바크르, 우마르, 우스만의 3대 정통 칼리파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다(그들을 찬탈자라고 하여 저주의 대상으로 삼기도 한다). 그리고 지도자로서 예언자 무함마드의 혈통을 잇는 것을 중시하며, 무함마드의 딸 파티마와 알리 사이에서 태어난 하산, 후세인을 각각 제2대, 제3대 이맘으로 삼는다(시아파 중 카이산파만은 알리와 다른 아내 하울라와의 아들 무함마드 이븐 하나피야를 제2대 이맘으로 삼는다). 일반적으로 하산이나 후세인의 혈통을 가진 사람들은 특히 "샤이크"나 "사이드"라고 불리며 종파를 불문하고 무슬림 사회에서 존경을 받지만, 사이드 자신도 예언자의 후예로서 사회로부터 존경을 받도록 몸가짐을 바르게 할 것을 요구받고 있으며, 시아파뿐만 아니라 사이드 자신이 울라마나 수피 교단의 샤이크 등 종교적 직책을 맡는 것도 일반적이었다. 이드리스 왕조나 파티마 왕조, 사파비 왕조처럼 경우에 따라서는 무함마드의 후예를 칭하는 사람들이 정권을 담당하는 경우도 많았다. 파티마 왕조는 이스마일파의 신앙 규범을 정비하고 시아파 왕조로서의 정통성을 주장했으며, 사파비 왕조도 신비주의 교단에서 발흥하여 12이맘파를 이라크, 이란 전역에 침투시켜 현재 이란 주변의 시아파 세력의 기반을 만들었다. 무함마드의 자녀 중 많은 이들이 요절했고, 무함마드의 혈통은 파티마를 통해서만 남겨졌기 때문에, 무함마드의 혈통을 잇는다는 것은 하산 또는 후세인의 자손이라는 것과 거의 같은 의미이다.

이슬람교 안에서도 특히 시아파에서는 무함마드가 무오류하다고 여겨지며, 알리를 포함한 후계 이맘들에게도 그 무오류성이 계승되었다고 본다. 따라서 시아파는 수니파의 하디스 중, 알리가 아부 바크르나 우마르, 우스만보다 열등했다는 하디스 등에 관해, 수니파가 알리로부터 칼리파의 자리를 찬탈한 것을 합법화하기 위해 위조된 것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다.

3. 3. 수니파에서의 알리

알리는 이슬람 문화에서 무함마드 다음으로 숭배받는 인물로 여겨진다. 알리는 용기, 정직함, 이슬람에 대한 변함없는 헌신, 관대함, 그리고 모든 무슬림에 대한 평등한 대우로 존경받는다. 그의 추종자들에게 그는 부패하지 않은 이슬람과 이슬람 이전의 기사도의 전형이 되었다.

수니파 이슬람에서 알리는 무함마드의 가까운 동료, 꾸란과 이슬람 율법에 대한 최고의 권위자, 수니 영성의 지혜의 근원으로 여겨진다. 632년 예언자가 사망했을 때, 알리는 가디르 쿰에 대한 언급일 수도 있는 지도력에 대한 주장을 제기했지만, 결국 무슬림의 단결을 위해 처음 세 명의 칼리프의 세속적 통치를 받아들였다. 수니 자료에서 알리는 첫 세 명의 칼리프의 신뢰받는 조언자로 묘사되며, 알리와의 갈등은 최소화되는데, 이는 동료들 간의 화합을 보여주려는 수니의 경향과 일치한다. 네 번째이자 마지막 라시둔 칼리프인 알리는 수니파 이슬람에서 특히 높은 지위를 차지하지만, 알리에 대한 이러한 교리적 존경은 최근의 발전이며, 이에 대해 저명한 수니 전통주의자 이븐 한발(855년 사망)의 공로가 인정될 가능성이 높다. 수니 동료들의 계층 구조는 알리를 그의 세 전임자 아래, 그와 싸운 사람들 위로 배치한다. 이러한 순서는 알리를 모든 동료보다 명확하게 높이는 예언적 발언에 대한 수니의 재해석을 요구했다.

알리는 이슬람 전통에서 많은 존칭으로 알려져 있으며, 그 중 일부는 특히 시아파에서 사용된다. 그의 주요 쿤야(테크노님)는 ʾAbū al-Ḥasan(알-하산의 아버지)이었다. 그의 칭호에는 ''알-무르타다'' (선택되고 만족하는 자ar), ''아사드 알라'' (신의 사자ar), ''Ḥaydar'' (사자ar, 원래 그의 어머니가 그에게 지어준 이름), ''아미르 알무미닌'' (신앙인의 지휘관' 또는 '신앙인의 왕자ar), 그리고 ''이맘 알무타킨'' (경건한 자의 지도자ar)이 있다. 그는 또한 ''아부 투라브'' (먼지의 아버지ar)라고도 불리며, 이는 처음에는 그의 적들이 사용한 경멸적인 표현일 수도 있다.

|thumb|알리와 관련된 꾸란에서 가장 논쟁적인 진술일 수 있는 walayaar 구절이 셀주크 시대의 이 기념비의 가장자리에 새겨져 있다.

알리는 꾸란의 율법과 일반적으로 관련된 임무에서 정기적으로 무함마드를 대표했다. 예를 들어, walayaar의 구절(5:55)은 알리가 모스크에서 기도하는 동안 거지에게 반지를 준 것에 대한 언급이며, 시아파와 일부 수니파의 설명에 따른다. 시아파 자료에서, tabligh의 구절ar(5:67)은 무함마드가 가디르 쿰에서 알리를 자신의 후계자로 지명하도록 자극했으며, ikmal al-din의 구절ar(5:3)은 그 후 이슬람의 완성을 선언했다. 정화의 구절(33:33)은 Ahl al-Bayt(집의 사람들ar)의 순결 상태와 관련이 있으며, 시아파와 일부 수니파 자료에서 알리, 파티마, 그리고 그들의 두 아들로 제한된다. Ahl al-Bayt에 대한 또 다른 언급은 mawaddaar의 구절(42:23)일 수 있다.

무함마드는 알리의 자질을 자주 칭찬했다. 가장 논란이 많은 발언은 "내가 그의 mawlaar(주인)인 자는 알리가 그의 mawlaar이다"라는 말로, 가디르 쿰에서 행해졌다. 지위의 하디스에서 무함마드와 알리를 모세와 아론에 비유한다. 시아파와 수니파의 표준 하디스 모음집에는 다음과 같은 예가 있다. "알리보다 용감한 젊은이는 없다", "알리를 사랑하는 자는 신자뿐이며, 알리를 미워하는 자는 위선자(munafiqar)뿐이다", "나는 알리에게서 왔고 알리는 나에게서 왔으며, 그는 내 뒤에 모든 신자의 waliar (후원자, 수호자)이다", "진실은 그[알리]가 가는 곳마다 그를 중심으로 돈다", "나는 지식의 도시이고 알리는 그 문(babar)이다", "알리는 꾸란과 함께 있고 꾸란은 알리와 함께 있다. 그들은 [천국의] 연못에서 나에게 돌아올 때까지 분리되지 않을 것이다."

수니파에서도 알리는 예언자의 사위이자 의붓아들로서, 또한 4대 정통 칼리프로서 높은 존경을 받고 있다. (게다가 일부에서는 그의 아들 하산을 5대 정통 칼리프로 보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아부 바크르나 우마르, 우스만의 칼리프 자리를 인정하는 수니파는 시아파만큼 알리를 높게 평가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알리 이븐 아비 탈리브는 수니파와 시아파 이슬람 모두에서 신비주의적이고 영적인 흐름의 공통적인 근원이다. 특히 알리는 일부 수피 운동의 영적 지도자이며, 수피들은 알리가 무함마드로부터 그의 비전적 지식과 성스러운 권위를 물려받았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 지식과 권위는 신자들이 하느님을 향한 여정을 안내한다. 거의 모든 수피 교단은 알리를 통해 무함마드까지 혈통을 거슬러 올라가는데, 나크쉬반디 교단은 아부 바크르를 통해 무함마드에 이른다는 점에서 예외이다.

4. 알리의 업적과 평가

알리의 칼과 방패가 새겨진 바브 알-나스르, 카이로


경건함과 용맹함으로 칭송받는 알리 이븐 아비 탈리브는 자신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 싸웠지만, 승리 후에도 관대함을 보였다. 심지어 일부 지지자들이 분노할 수 있음에도 여성의 노예화를 막기 위해 노력했다. 그는 또한 슬픔을 드러내고 죽은 자들을 위해 울었으며, 적들을 위해 기도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알리는 또한 그의 이상주의와 정치적 유연성 부족, 평등주의 정책과 엄격한 정의가 많은 사람들을 적으로 만들었기에 비판을 받기도 했다. 어쨌든, 그의 종교적 신념에 뿌리를 둔 알리의 이러한 자질들은 오늘날 그의 추종자들에게 정의를 특히 포함한 이슬람 미덕의 전형으로 여겨지게 하는 데 기여했다. 알리는 또한 이슬람 기사도 정신(futuwwa)의 모범으로 여겨진다.

알리에 대한 역사적 기록은 종종 편향적이다. 예를 들어, 일부 수니파 자료에서는 알리를 대머리에 체격이 좋고 다리가 짧으며 어깨가 넓고 몸에 털이 많으며 긴 흰 수염을 가지고 있고 눈에 염증이 있는 사람으로 묘사한다. 알리의 외모에 대한 시아파의 기록은 뚜렷하게 다르다. 아마도 그것은 유능한 전사로서의 그의 명성에 더 부합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알리의 행동에 대해서는 일부 수니파 자료에서 거칠고 무뚝뚝하며 사교적이지 않은 사람으로 묘사한다. 반대로, 시아파 자료에서는 그를 관대하고 부드럽고 쾌활한 사람으로 묘사하며, 심지어 시리아 전쟁 선전에서 그를 경박하다고 비난할 정도였다. 시아파와 수피 자료는 특히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그의 친절한 행위에 대한 보고서로 가득하다. 알리에게서 비롯된 것으로 여겨지는 한 편지에서 묘사된 지휘관에게 필요한 자질은 그 자신에 대한 초상화였을 것이다: 화를 내는 데 느리고, 기꺼이 용서하며, 약자에게 친절하고 강자에게는 엄격하다. 그의 동료인 사사 이븐 수한은 그를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그[알리]는 우리와 함께 우리 중 하나로서, 부드러운 성품을 가지고, 극도로 겸손하며, 우리가 그의 머리 위에 칼을 든 자 앞에서 갇힌 죄수가 느끼는 경외심과 같은 경외심을 가질지라도, 가볍게 이끌었다."

4. 1. 정의로운 통치와 행정 정책

알리 이븐 아비 탈리브|알리]]의 칼리파 시대는 엄격한 정의 구현으로 특징지어진다.[2] 그는 무함마드의 통치 방식을 회복하고자 급진적인 정책을 시행했으며, 부패했다고 여겨지는 우스만 휘하의 거의 모든 총독들을 해임했다.[2] 또한 국고 자금을 무슬림들에게 평등하게 분배하고 부패에 대해 무관용 원칙을 고수했다.[2]



알리의 평등주의 정책은 일부 사람들에게 지지를 받았지만, 무아위야 1세를 포함한 다른 이들은 우스만에 대한 복수를 구실로 반란을 일으켰다.[2] 이로 인해 알리는 정치적 순진함과 과도한 엄격함으로 비판받기도 했지만, 지지자들은 그의 의로움과 정치적 편의주의 부재를 칭찬하며 꾸란 68장 9절을 인용하며 옹호했다.[2]

알리는 스스로를 세속적 지도자일 뿐만 아니라 종교적 권위자로 여겼으며, 꾸란과 수나를 해석할 권위를 주장했다. 일부 지지자들은 그를 신성한 지도자로 여겨 절대적인 충성()을 바쳤다.

알리는 지방 세입에 대한 중앙 집중 통제를 반대하고, 잉여 세금과 전리품을 무슬림에게 균등하게 분배했다. 이는 우마르 및 우스만과는 대조적인 정책이었다. 알리의 정책은 소외 계층과 이라크 이주민들의 지지를 얻었으나, 탈하와 주바이르 등 쿠라이시 출신 인사들은 알리의 특혜 거부에 반발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알리는 관료들에게 자발적인 세금 징수와 가난한 사람들을 우선시하는 공금 분배를 지시했으며, 총독에게는 세금 징수보다 토지 개발에 힘쓰도록 지시했다.

알리는 경건함과 용맹함으로 칭송받았으며, 승리 후에도 관대함을 보였다. 그는 적들을 위해 기도했다고 전해지며, 여성의 노예화를 막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그의 이상주의와 정치적 유연성 부족, 평등주의 정책은 많은 적을 만들었다는 비판도 받았다. 그의 종교적 신념에 기반한 이러한 자질들은 오늘날 그의 추종자들에게 이슬람 미덕의 전형으로 여겨지게 한다. 알리는 이슬람 기사도 정신()의 모범으로도 여겨진다.

알리에 대한 역사적 기록은 편향적인 경우가 많다. 일부 수니파 자료는 알리를 부정적으로 묘사하는 반면, 시아파 자료는 그를 관대하고 쾌활한 인물로 묘사한다. 수피 자료는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그의 친절한 행위를 강조한다. 알리의 동료 사사 이븐 수한은 그를 겸손하고 부드러운 성품을 가진 인물로 묘사했다.

4. 2. 이슬람 율법과 신학에 대한 기여

알리에게 귀속된 대부분의 저작들은 처음에는 연설로 전달되었고, 나중에 다른 사람들에 의해 기록되었다. 그는 다른 사람들에게 가르쳤을 수도 있는 두아 쿠마일과 같은 간청도 있다.

Nahj al-balagha/나흐지 알-발라가ar의 옛 필사본, 서기 1150년경


나흐지 알-발라가/Nahj al-balaghaar ()는 11세기에 수집된 설교, 서한, 격언집으로, 모두 알리에게 귀속되며, 저명한 십이 이맘파 학자인 샤리프 알-라디()가 엮었다. 때때로 민감한 내용 때문에, 나흐지 알-발라가/Nahj al-balaghaar의 진위는 오랫동안 논쟁의 대상이 되어 왔다. 그러나, 초기 자료에서 그 내용을 추적하여 최근의 학술 연구는 나흐지 알-발라가/Nahj al-balaghaar의 대부분을 알리에게 귀속시켰다. 특히 알-아쉬타르에게 보낸 지침이 담긴 이 책은 이슬람 통치의 이념적 기반이 되었다. 이 책은 또한 사회적 책임을 자세히 논하며, 더 큰 책임이 더 큰 권리를 낳는다고 강조한다. 나흐지 알-발라가/Nahj al-balaghaar는 또한 샤크샤키야 설교에서 알리의 선임자들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 알리에게 반란을 일으킨 아이샤, 탈하, 주바이르에 대한 비난과 같은 민감한 내용을 담고 있다. 가장 웅변적인 아랍어의 전형으로 칭송받는 나흐지 알-발라가/Nahj al-balaghaar는 아랍 문학과 수사학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무타질라 학자인 이븐 아빌-하디드()의 포괄적인 저술을 포함하여, 이 책에 대한 수많은 주석이 쓰여졌다.

구라르 알 히캄/Ghurar al-hikamar의 고대 필사본


구라르 알-히캄 와 두라르 알-칼림/Ghurar al-hikam wa durar al-kalimar(번역: 고귀한 격언과 말씀의 진주)은 압드 알-와히드 알-아미디()에 의해 편집되었으며, 그는 샤피 법학자이거나 십이 이맘파 학자였다. 이 책에는 알리의 경건함과 윤리에 관한 수천 개의 짧은 격언이 담겨 있다. 이 격언들과 알리에게 귀속된 다른 작품들은 이슬람 신비주의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알-부루즈 (85:1–3)의 첫 세 구절이 담긴 알리의 무샤프는 이라크 나자프에 있는 이맘 알리 사원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알리의 무샤프는 꾸란의 첫 번째 필사자 중 한 명인 알리가 편찬한 꾸란의 개정본이다. 일부 시아파 전승에 따르면, 알리의 이 코덱스(무샤프/mushafar)는 계승 위기 동안 공식적인 사용을 위해 거부되었다. 일부 초기 시아파 전통은 표준 우트만 코덱스와의 차이점을 시사하지만, 현재 시아파의 지배적인 견해는 알리의 개정본이 내용의 순서를 제외하고는 우트만 코덱스와 일치한다는 것이다. 알리의 코덱스는 그가 다시 나타날 때 코덱스(및 알리의 권위 있는 주석)를 공개할 무함마드 알-마흐디가 소유하고 있다고 한다.

키타브 알리/Kitab Aliar (알리의 책)은 알리가 수집한 예언적 격언의 현존하지 않는 모음집이다. 이 책은 세부적인 형법을 포함하여, 합법 (halal/할랄ar) 및 불법 (haram/하람ar) 문제와 관련이 있었을 수 있다. ''키타브 알리/Kitab Aliar''는 또한 무함마드가 그의 가족을 위해 쓴 난해한 가르침을 담고 있다고 전해지는 와도 자주 연결된다. ''키타브 알리/Kitab Aliar''의 사본은 8세기 초까지 이용 가능했을 가능성이 높으며, 그 일부는 후기 시아파와 수니파 저작에 남아있다.

두아 쿠마일(두아 쿠마일/Du'a' Kumaylar)은 알리에게서 유래되었고 그의 동료인 쿠마일 이븐 지야드(Kumayl ibn Ziyad)가 전한 시아파의 대중적인 기도문이다. 알리에게 귀속된 것으로는 시아파 하디스집인 만 라 야흐두루후 알-파키]]/Man La Yahduruhu al-Faqihar에 온전히 인용된 이슬람 율법에 관한 키타브 알 디야트/Kitab al-Diyatar(계약의 책)이 있다. 그의 칼리프 시대 동안 알리의 사법적 결정과 행정 명령 또한 기록되었다. 알리에게 귀속된 다른 현존하는 작품들은 알-카피/

꾸란의 표준 암송은 알리에게서 유래되었으며, 그의 저술 유산은 꾸란 주석으로 가득하다. 초기 주요 주석가인 이븐 아바스는 알리가 꾸란 해석에 기여했다고 평가했다. 알리는 또한 수백 건의 예언자 하디스를 전했다. 그는 하디스에 대한 최초의 체계적인 평가를 한 것으로도 알려져 있으며, 하디스 학문의 창시자로 여겨지기도 한다. 알리는 또한 일부 사람들에게 이슬람 신학의 창시자로 여겨지며, 그의 말에는 이슬람의 신의 단일성(tawhid)에 대한 최초의 합리적 증거가 담겨 있다. 후기 이슬람 철학에서 알리의 말과 설교는 형이상학적 지식을 얻기 위해 연구되었다. 특히, 나흐지 알-발라가/Nahj al-balaghaar는 꾸란과 순나 다음으로 시아 철학 교리의 중요한 자료이다. 시아파 이맘으로서 알리에게 귀속된 진술과 관행은 시아 이슬람에서 널리 연구되며, 여기서 그것들은 예언적 가르침의 연속으로 간주된다.

알리는 꾸란의 율법과 일반적으로 관련된 임무에서 정기적으로 무함마드를 대표했다. 예를 들어, 왈라야/walayaar의 구절(5:55)은 알리가 모스크에서 기도하는 동안 거지에게 반지를 준 것에 대한 언급이며, 시아파와 일부 수니파의 설명에 따른다. 만약 그렇다면, 이 구절은 알리에게 무함마드와 동일한 영적 권위(왈라야/walayaar)를 부여한다. 시아파 자료에서, 타블리그의 구절]/tabligh의 구절ar(5:67)은 무함마드가 가디르 쿰에서 알리를 자신의 후계자로 지명하도록 자극했으며, 이크말 알-딘의 구절]/ikmal al-din의 구절ar(5:3)은 그 후 이슬람의 완성을 선언했다. 정화의 구절(33:33)은 Ahl al-Bayt()의 순결 상태와 관련이 있으며, 시아파와 일부 수니파 자료에서 알리, 파티마, 그리고 그들의 두 아들로 제한된다. Ahl al-Bayt에 대한 또 다른 언급은 마왓다/mawaddaar의 구절(42:23)일 수 있다. 시아파에게 이 구절은 Ahl al-Bayt를 사랑하고 따르라는 꾸란의 명령이다.

무함마드는 알리의 자질을 자주 칭찬했다. 가장 논란이 많은 발언은 "내가 그의 마울라/mawlaar(주인)인 자는 알리가 그의 마울라/mawlaar이다"라는 말로, 가디르 쿰에서 행해졌다. 시아파에 따르면, 이것은 알리에게 무함마드와 동일한 영적 권위(왈라야/walayaar)를 부여했다. 지위의 하디스에서 무함마드와 알리를 모세와 아론에 비유하여, 시아 이슬람에서 알리가 무함마드의 뒤를 이을 권리를 찬탈했음을 지지한다. 시아파와 수니파의 표준 하디스 모음집에는 다음과 같은 예가 있다. "알리보다 용감한 젊은이는 없다", "알리를 사랑하는 자는 신자뿐이며, 알리를 미워하는 자는 위선자(무나피크/munafiqar)뿐이다", "나는 알리에게서 왔고 알리는 나에게서 왔으며, 그는 내 뒤에 모든 신자의 왈리/waliar (후원자, 수호자)이다", "진실은 그[알리]가 가는 곳마다 그를 중심으로 돈다", "나는 지식의 도시이고 알리는 그 문(바브/babar)이다", "알리는 꾸란과 함께 있고 꾸란은 알리와 함께 있다. 그들은 [천국의] 연못에서 나에게 돌아올 때까지 분리되지 않을 것이다."

4. 3. 군사적 업적

알리는 630년 타부크 원정을 제외한 모든 군사 임무에 무함마드를 수행했는데, 이때 알리는 메디나를 책임지기 위해 남겨졌다. 위치에 관한 하디스는 이 사건과 연관되어 있는데, "알리야, 내가 너에게 아론이 모세에게 했던 것처럼 서는 것에 만족하지 않느냐, 나 이후에는 예언자가 없을 것이다."라는 구절이 있다. 이 진술은 사히 알-부하리와 사히 무슬림을 비롯한 정통 수니파 자료에 나타난다. 시아파에게 이 하디스는 알리가 무함마드의 계승권을 찬탈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무함마드가 부재한 동안 알리는 628년 파다크 원정을 지휘했다.

카이바르 전투에서의 알리


알리는 전장에서 용맹함으로 유명했으며, 패배한 적에 대한 관대함으로도 유명했다. 그는 바드르 전투 (624)와 카이바르 전투 (628)의 기수였다. 그는 우후드 전투 (625)와 후나인 전투 (630)에서 무함마드를 맹렬하게 방어했으며, 카이바르 전투에서의 무슬림의 승리는 그의 용맹함에 기인한 것으로, 그는 적 요새의 쇠문을 찢어버렸다고 한다. 알리는 또한 627년 참호 전투에서 이교도 챔피언 암르 이븐 압드 우드를 물리쳤다. 알-타바리에 따르면, 무함마드는 우후드에서 신의 음성을 들었다고 보고했는데, "칼은 줄피카르([알리의 칼]) 외에는 없고, 기사도 정신을 가진 젊은이(fataar)는 알리 외에는 없다." 알리와 또 다른 동료 주바이어는 626년바누 쿠라이자 남성들의 배신에 대한 살해를 감독한 것으로 보인다. 627년, 이 기록의 역사성은 의심받아왔다.

무슬림 내전 동안, 알리는 병사들에게 약탈을 금지했으며, 대신 세입으로 그들에게 급여를 지급했다. 그는 또한 승리 후에도 적들을 용서했다. 이 두 가지 관행은 나중에 이슬람 율법에 명시되었다. 알리는 또한 그의 지휘관 알-아쉬타르(al-Ashtar)에게 어떠한 평화 요청도 거부하지 말고, 어떠한 협정도 위반하지 말 것을 조언했으며, 적대 행위를 시작하지 말라고 명령했다. 알리는 이와 유사하게 그의 군대가 민간인을 괴롭히는 것을 금지했고, 부상자와 도망가는 자를 죽이거나, 시체를 훼손하거나, 허가 없이 집에 들어가거나, 약탈하거나, 여성을 해치는 행위를 금지했다. 그는 일부의 항의에도 불구하고 승리 후 여성의 노예화를 막았다. 무아위야와의 시핀 전투 전 알리는 보복하지 않았으며, 우위를 점했을 때 적들이 식수에 접근하도록 허용했다.

4. 4. 현대 이슬람 사회에 미치는 영향

알리 이븐 아비 탈리브는 이슬람 문화에서 무함마드 다음으로 숭배받는 인물로 여겨진다. 알리는 용기, 정직함, 이슬람에 대한 변함없는 헌신, 관대함, 그리고 모든 무슬림에 대한 평등한 대우로 존경받는다. 그의 추종자들에게 그는 부패하지 않은 이슬람과 이슬람 이전의 기사도의 전형이 되었다.

그는 유일하게 수니파시아파 양쪽으로부터 공인된 지도자이다. 이란-이라크 전쟁에서 수니파 이라크 병사들은 알리의 초상을 '부적 대용'으로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솔로몬 왕의 반지, 아담의 셔츠, 모세의 지팡이를 가지고 있었다고 전해진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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